신달도(申達道 ; 1576∼1631)의 자는 형보(亨甫), 호는 만오(晩悟), 본관은 아주(鵝洲)이며, 참의 원록(元祿)의 손자이고, 흘(흘)의 아들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서 7∼8세에 『효경(孝經)』과 사자서(四子書)를 통독 하였다. 조목(趙穆)과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으로 1610년(광해군 2)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으나, 정계가 혼란하여 관직에 나가는 것을 단념하였다. 1623년(인조 15) 5월에 명나라 희종(熹宗) 등극을 기념하는 유생정시(儒生庭試)에 갑과를 장원급제하여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의 요직을 역임였다. 이때 대간(臺諫)이 권신(權臣)을 탄핵했으나 왕이 오히려 대간을 문책하자 공이 몸을 아끼지 않고 아뢰기를 "대간은 항상 공의(公議)를 가져서 군주의 이목이 되옵거늘 공의(公議)가 있는 바에 대간이 어찌 말하지 않으오리까"하니 공의 곧은 성품이 조정에 진동하였다. 이후 전주판관(全州判官)이 되어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실시하고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를 강론하여 교화에 힘썼다. 1627년 형조(刑曹)·예조(禮曹)의 정랑(正郞)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어 10조소(條疏)를 올려 시정을 논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윤황(尹煌)과 함께 최명길의 주화론(主和論)을 극력배격하였다. 이듬해 지평(持平)이 되었고, 1631년(인조 9)에 세상을 뜨니 도승지(都承旨)로 추증(追贈)되었다.
1626년 신달도는 예조 정랑(禮曹正郎)에 제수되어 함경도의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을 가서 살폈다. 돌아와서는 서쪽지방의 굶주린 백성들이 관북으로 유입되는 상황에 대해 상소를 올리고, 또한 송태조(宋太祖)가 심륜(沈倫)을 시켜 군량미를 내어 양사(楊泗)지역의 굶주린 백성을 구휼시킨 고사를 거론하며 군량미를 내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에게 직언을 하다.
1626년 겨울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신달도는 당시의 폐단 10가지를 간언하니, 즉 ‘어진이를 등용하고, 수령을 잘 선택하며, 백성의 마음을 잘 추스르고, 풍속을 두텁게 하며, 언론을 열어놓고, 가려진 것을 터트리며, 옥사를 잘 다스리고, 쓸데없는 관직을 살피며, 공물과 납세를 균등히 하고, 군정을 정비하라.’이다. 또한 상소 말미에 다시 왕이 자신을 반성하여 근신하고 덕을 닦는 진실을 거듭 아뢰니 임금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였다.
결사항전의 자세
1627년 봄에 정언(正言)에 제수 되었다. 당시 청나라 병사들이 갑자기 쳐들어오자, 임금은 신료들을 모아 놓고 몽진(蒙塵)을 의논하였다. 신달도는 도성을 굳게 지키고 병사를 이끌고 나가 친히 정벌해야 한다고 청을 하자 임금은 낯빛을 바꾸었다.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강화도[江都]에 들어가자 화친의 잘못됨을 힘써 간쟁하고, 원수를 갚고 부끄러움을 씻을 계책을 무수히 내었다. 계책이 비록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지식인들은 그가 옳다고 여겼다.
뛰어난 외교가
병자호란 당시 명나라 원수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를 지키고 있었는데, 조선이 적을 끌어들여 가도를 급습하게 하였다는 등의 말로 우리나라를 무고하였다. 신달도는 왕명을 받들어 모문룡의 병영에 들어가서 좋은 말로 응대하니, 원수 모문룡은 마침내 감동하여 가도에 잡혀있는 조선인을 모두 돌려보내고, 또한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형세와 적의 정황을 두루 말해주었다. 신달도는 빨리 돌아와 이를 알리니 임금이 그를 기특하게 여겨 지평(持平)으로 소환하였다. 공이 어전에 나아가 임금을 면대하자, 특별한 유지(諭旨)로 그를 칭찬하였다.
불의에 분개하다.
신달도가 지평(持平)에 제수되었을 당시 대간들이 훈재(勳宰)들의 교만하고 횡포한 실수를 논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역하여 파직을 당하였다. 그는 곧 대청에 나아가 훈재의 실정을 힘써 아뢰어 말로 임금을 핍박하자, 좌우의 신하들이 한 때 자신의 혐의를 회피하려고 사직을 고려하였다. 이에 임금이 크게 노하여 특별히 체포할 것을 명하였다. 이일로 정직한 명성을 온 나라에 떨치게 되었으니 세상에서는 3학사라 부른다. 대개 윤황(尹煌), 조경(趙絧) 그리고 공을 가리킨다.
신달도는 1629년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장령(掌令)을 역임하고, 임금의 명으로 조정으로 돌아왔다. 당시 어떤 한 훈재(勳宰)가 경연 중에 재상을 침해하고 업신여기자 그는 “재상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조정을 우러러보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고 상소를 올려 그를 탄핵하였다. 이에 조정대신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